• 2024. 10. 5.

    by. 미술사

    서양미술사에서 초기 기독교 예술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개발해 왔습니다. 이 개발은 훗날 중세에 와서 표준화된 레퍼토리로 정리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줍니다. 제시된 일화들은 성경에 나오는 친숙한 일화로 등장 인물들의 외모나 옷차림과 상징을 통해 어떤 인물인지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원후 200년에서 300년에 로마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 이후, 50년 동안 26명의 사람이 왕관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모두 오래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는 혼란한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24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등장으로 로마는 다시 안정을 찾게 됩니다. 단, 이 디오클레이타누스 황제 후기에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많이 좋지 않다가, 그 다음 왕 콘스탄티누스의 신앙 자유 승인으로 기독교는 극적으로 안정을 찾게 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며 카타콤 (지하묘지)에서 초기 기독교 예술 범례를 만들고 있었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공식 수용으로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예술 작품이 발현하게 됩니다. 이는 부유한 권력자들이 기독교로 유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의 집대성 - 로마 카타콤 (지하묘지)

    초기 기독교 예술 작품은 로마 카타콤을 중심으로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로마인들이 망장의 신성함을 존중했고, 그에 따라 기독교 박해 중에도,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동료를 이곳에 무사히 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대부분의 카타콤을 소유하고 관리했고, 초기 순교자들은 이 곳에 묻혔습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을 보여주는 카타콤에 남은 벽화, 그리고 종교 승인 이후의 작품들

    이 시기 카타콤에 남은 벽화의 질은 우수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해당 시기가 기독교 박해의 시기였고, 이에 따라 대부부의 개종자가 가난한 사람 및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승인하여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승인함에 따라 기독교 예술 작품이 발전하게 되었고, 부유한 권력자들이 개종을 하면서 기독교 예술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은이나 상아로 만든 비싼 품목들에서 기독교의 이미지가 확인되며, 여기에는 결혼 예물, 책표지, 장식함, 빗 등이 포함됩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의 그림 구성

    기독교만의 색채를 드러내기 보다는 고전 예술의 양상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황제를 위한 자주색 예복을 입고 있기도 했고, 이교도의 주제와 겹치기도 했습니다. 오르페우스나 머큐리의 이미지와 선한 목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이미지와 겹치기도 했습니다. 이는 양이 몇몇 다른 신앙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흔한 동물이었다는 점, 젊은 청년이 어깨에 어린 양을 짊어지고 가는 그림이나 조각이 오직 기독교에서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회피하는 주제

    고대에는 형벌 중에 십자가형이 있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생을 마감하는 것은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의 모습은 특히 회피하는 주제였습니다.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주제로 개종자들의 신심을 끌어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주제는 더더욱 회피하였습니다. 이후, 이 주제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도, 고난보다는 생기 넘치는 당당함으로 표현을 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이겨내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예술의 대표 미술 작품

    로마 카타콤의 '노아와 비둘기'는 수많은 성경 장면 중의 하나로 구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흔하게 다뤄지는 주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노아는 수염이 없는 젊은이를 표현되었으며, 후기 기독교 예술에서 노아가 모두 노인으로 표현되는 것과 비교하면 주목할 만 합니다. 그리고 올리브 잔가지를 물고 돌아온 비둘기를 보며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기도하는 오란트 (orant)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서양 예술보다는 동방 교회에서 흔한 것으로 동방 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 밖에, 이 시기의 친숙한 소재로는 풀무 불에 던져진 세 친구, 사자굴의 다니엘 그리고 요나와 고래 등이 있었습니다.

     

    로마 모자이크 '전차 경주'는 그 당시 인기있는 전차 경주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쿼드리가 (네 마리의 말) 경주를 표현한 작은 모자이크를 이어붙인 그림입니다. 이 경주에는 네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해당 작품에선 이 중 녹색 파벌 소속의 일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라 에우로포스의 '에스겔의 환영' 은 프레스코화로 구약성서 그림의 연작 중 하나입니다. 로마 제국 끝의 국경 도시인 두라 에우로포스 (현재는 시리아의 콸라테 살리히예)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예언자 에스겔이 바빌론 유배 중에 경험한 묵시론적 환영을 묘사한 것인데 예수가 망자의 뼈에 살을 입혀 망자가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을 목격한 장소인 마른 뼈의 계곡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옛 성 베드로 성당 '유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은 화려하게 조각된 석관으로 기독교의 부흥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승인과 함께 부유한 권력자들이 기독교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유니우스 바수스는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로마의 시장격인 인물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도는 이교도 신의 머리를 밟고 있는 형태로 조각되었으며, 이는 초기 기독교 예술의 좋은 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옛 성 베드로 성당은 초기 기독교 시기의 위대한 교회로, 320년 경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황제가 서거한 337년에도 여전히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이 성당은 성 베드로가 묻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성당으로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성시 된 건물입니다. 여러 번에 걸쳐 보수가 되었지만, 15세기 경에 많이 손상되었으며, 결국 교황 율리오 2세는 이 성당을 완전히 철거할 것을 결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게 되는데 이 것이 현재의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서양미술사의 초기 기독교 예술의 집대성 카타콤과 그 곳의 벽화, 그림의 구성, 회피하는 주제 그리고 대표 미술 작품
    서양미술사 초기 기독교 예술